김정희선생유적은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는 추사 김정희의 유적으로 김정희 선생 고택과 월성위 김한신묘, 화순옹주 홍문, 예산 용궁리 백송, 김정희묘가 있으며 1980년 10월 23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되었다.
추사김정희는 글과 그림, 글씨가 독창적이며 이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학자이며 예술가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나고 일찍 글을 깨우치며 천재성을 보였다고 한다.
24세인 순조 9년(1809)에 청나라에 사신으로 떠나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간 김정희는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옹방강, 완원 등을 만나 재능을 인정받고 이후 일생 교유하였다. 또한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고증학에 관심을 가졌다. 귀국한 후에는 '사실을 밝혀서 진리를 추구한다'는 실사구시의 정신에 입각하여 학문율 완성해 나갔다.
김정희는 제자가 많아 '추사의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는데, 그들 중에 19세기 후반 개화 사상가로 이름을 남긴 이들이 많다. 55세 때인 헌종 6년(1840)에 정쟁에 휘말려 제주도에 약 9년간 유배되었는데, 이 시기에 추사체라는 독창적인 글씨체를 이루었다. 그의 글씨는 인기가 높아 청나라와 일본에서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헌종은 김정희의 글씨를 사랑하여 유배 중에도 글씨를 요구하였다고 한다.
이 일대는 김정희가 나고 자란 고택과 그가 묻힌 무덤, 증조부 김한신의 묘와 중조모 화순옹주의 열녀문, 김정희가 청나라에서 가져온 백송, 그가 수도하던 화암사 둥의 유적이 있어 그의 자취와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김정희선생 유적 안내문
추사기념관 우측에는 강관우 작가의 '고독한 예술혼'이라는 조각 작품이 세워져 있는데 작가는 고고한 예술혼을 지니신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제주 유배시절을 상상하며 "옥돌괴"위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예술가의 고독을 조각작품으로 표현하였다고 한다.
김정희 선생은 헌종(憲宗) 6년(1840)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 대정현에 8년간 유배되었다가 1848년에 석방되었다. 제주도 서귀포에 있는 추사관과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된 김정희 유배지도 티스토리 블로그에 소개했으니 아래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
이 고택은 김정희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곳으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로 1976년 1월 8일 지정됐다. 김정희 선생의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대왕의 사위가 되면서 예산과 서울에 저택을 하사받았다.
예산의 집은 53칸 규모였는데, 1976년에 그중 일부만 복원해 현재 고택의 모습을 갖추었다.
예산은 조상의 터전이 있는 곳이라 김정희 선생은 성묘와 독서를 위해 자주 왕래하며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 묘역
김정희 선생 고택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곳에는 과천에 안장되어 있던 것을 1937년 선조가 있는 이곳으로 이장한 김정희선생 묘역이 있다.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8호로 지정되었다.
추사 김정희 묘역은 김정희와 첫째 부인 한산 이씨, 둘째 부인 예안 이씨 세분이 함께 묻힌 합장묘이다. 비문은 1937년 후손 김승렬이 짓고 새겼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김정희 선생은 경기도 과천에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다가 71세에 생을 마치셨다.
죽기 전까지 글씨 쓰기를 계속했는데, 봉은사 경판전을 위한 현판인 판전을 쓴 것이 죽기 사흘전이었다고 한다.
묘 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고 오른쪽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의 전면에는 阮堂先生慶州金公諱正喜墓 (완당선생경주김공휘정희묘) 라고 각서되어 있고 나머지 3면에는 비문이 적혀 있다.
월성위 김한신의 묘
김정희의 증조부인 김한신과 부인 화순옹주가 함께 묻힌 묘이다.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은 13세에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졌다. 총명하여 영조의 사랑을 받았으며, 벼슬은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귀한 신분임에도 평소에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지 않고 항상 겸손하게 몸을 낮추어 생활했다고 한다.
묘소 앞 비문에는 영조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화순옹주 홍문
화순옹주 홍문은 영조의 둘째 딸이자 김정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는 열녀문이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1984년 5월 17일 지정되었다.
화순옹주는 13세에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과 결혼했다. 김한신이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화순옹주는 14일을 굶어 남편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옹주가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고 죽었으니 불효라 하여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으나, 후에 정조가 열녀문을 내렸다. 화순옹주는 조선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이다.
추사기념관
추사기념관은 추사 김정희의 창조 정신과 위대한 업적을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 건립하여 작품을 체계적으로 보존·전시하고 있다.
추사기념관 관람시간은 하절기(3월~10월) 09:00 ~ 18:00, 동절기(11월~2월) 09:00 ~17:00 으로 연중무휴하고 있으며, 관람료는 무료이고 추사체험관의 체험은 유료이다.